화순의 5월 민주화항쟁 유적과 추모비를 찾다

화순매일신문 | 기사입력 2019/05/15 [16:31] 글자 크게 글자 작게

화순의 5월 민주화항쟁 유적과 추모비를 찾다

화순매일신문 | 입력 : 2019/05/15 [16:31]

 

▲ (그림) 구충곤 화순군수.     © 화순매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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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을 지나 5월이 되었다. 화순의 5월은 찬란하다. 화순의 봄날을 상징하는 백아산과 화학산의 고산 철쭉이 만개하여 고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화순읍 수만리에서 큰 재를 지나 안양산까지 이어지는 철쭉공원도 상춘객을 유혹하고 있다. 화순의 찬란한 5월을 맞이하여 외지 방문객이 늘고 있다.

 

휴일이 되면 화순읍 곳곳에서 교통체증이 일어나기도 한다.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모내기가 시작되는 등 농촌의 일정도 분주해지고 있다. 바쁜 군정 일정을 잠시 밀어두고 화순 곳곳에 산재한 5.18 관련 유적과 추모비를 찾아 나섰다. 군민의 심부름꾼, 공인(公人)으로서 자세를 가다듬고 관련 시설물의 현황 등을 점검해 보고자 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 시민군이 최초로 무장한 화순역 광장

화순에 있는 518 사적지는 총 10곳이다. 화순광업소를 비롯하여 군청 앞, 시외버스터미널 옛터, 화순역 광장, 너릿재, 화순경찰서, 714대대 앞, 만연사 입구, 옛 역청공장 등이다.

 

먼저 화순역을 찾았다. 5.18 때 시민군이 처음으로 총기를 입수하여 무장한 곳이다. 1980518 광주민중항쟁 당시 광주 시내는 피로 물들었다. 그 비보가 광주 인근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518일 당일에 벌어진 민주화 시위는 계엄군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19일 아침, 광주는 겉으로는 평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평일이었기에 회사와 관공서는 문을 열었다. , , 고교에서도 정상 수업이 이뤄졌다. 하지만 전날의 충격과 분노는 시민들의 마음을 들끓게 하고 있었다. 오전 9시부터 시민들이 금남로를 향해 속속 모이기 시작했다. 오전 10시가 되어 30004000여 명의 군중이 집결하여 경찰, 군인과 대치했다.

 

▲ 화순역 광장의 5.18 추모비.     © 화순매일신문


시위대에는 학생도 있었지만 일반 시민들의 비중이 눈에 띄게 늘었다
. 전날의 계엄군의 폭력에 대한 소식이 시민들에게 전해졌기 때문이다. 분노한 시민들이 시위에 가세하기 시작했다. 화순도 18일 이후 벌어진 공수부대의 만행이 낱낱이 전해졌다.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의 집단 발포가 있었던 21일에 분노는 절정에 달하였다. 처음에는 공포탄인지라 사람들은 놀라 숨었다가 다시 나왔다. 그러자 이제는 진짜로 시민들을 향한 조준사격이 이루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이나 주변 건물에 있던 사람들도 총을 맞았다. 계엄군은 기관총을 난사하고, 심지어는 헬기까지 동원하여 군중을 해산시키고자 총탄을 퍼부었다. 21일 전남도청 앞에서 발생한 계엄군의 발포로 인해 최소 54명이 사망하고 5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21일 오전 10시부터 전남대학교 정문과 후문에서 5만여 명의 시위대가 집결하여 공수부대의 철수와 연행자 석방을 요구했다. 통곡의 상황을 접한 화순 군민 2,000여 명도 군청과 경찰서 앞 사거리 일대로 모여 들었다. 화순 버스터미널 인근 시장에도 김밥을 준비하고 간식을 나누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삼삼오오 모여 구호를 외치고 분노를 표현하였으며, 광주 사람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연대를 이뤄갔다.

 

화순군에서 전례를 찾기 힘든 대규모 군중의 운집이었다. 집결해 있던 화순 군민들은 뜻하지 않은 무리들과 마주친다. 무기를 구하기 위해 화순을 찾은 시위대 트럭들이었다. 돌멩이나 각목으로 버티던 시위대가 무장을 결단하고 광주에서 가까운 화순을 비롯하여 나주보성 등에서 무기를 입수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시위차량에서 내린 청년들은 광주의 처참한 상황을 전달하며 협조를 요청했다.

 

화순 역전 파출소로 몰려갔다. 이곳에서 총기 750여 점, 실탄 600여 발이 시민의 손에 들어갔다. 시위대가 시민군으로 면모되고, 무장이 시작되었다. 화순역 광장 앞에는 까만 대리석으로 만든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당시 현장의 모습을 전하는 지도와 그림 외에 5월과 광주를 상징하는 김준태의 화순 그대 영원한 참세상의 고향이여가 새겨져 있다. 표지석과 안내판의 기둥 일부가 파손되어 방치되어 있다. 누구를 탓할 것인가? 화순 행정의 최고 책임자인 군수의 잘못이다.

 

시민군의 무장은 역전파출소의 무기고를 활용하여 이루어졌다. 일흥상회, 윤빵집, 노점빵, 꼬마점빵 등 주변상가도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화순역을 뒤로 한 채 버스터미널 사거리로 향하면서 이종현 시인의 화순역을 읊조려 본다.

 

서라실 복사꽃이

기적소리에 덩달아 흔들렸다오.

 

흔들리는 마음이야

훌쩍 커버린 키만큼

볼 붉어지겠지만

오신다는 님은 올동말동

봄은 다 가고

새 역사는

미련스럽게도 우두커니 남아있네요.

 

어릴 적, 멀구슬나무 덩그라니

역전 광장에

구슬치기 땅따먹기 하는 아이들

손등 연탄때 시커멓토록 해질녘

올 사람도 없는 역 대합실 기웃거리다가

기적소리 빨간 철다리로 울려나는가

 

내리는 사람 다 사라지고

시민군이 무장하던 역전파출소는

그날의 함성과 깃발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적만 흐르는데

 

오십이 넘은 지금에도

화순역

토종소나무 아래서

그날의 봄을 기다리네.

 

다행히 화순역 주변에 대형 아파트들이 들어섰고 또한 건설 중에 있다. 상권 활성화, 주거 및 교통 환경 개선 등을 통해 화순역 르네상스를 기대해 본다. <하편으로 이어집니다>

 

[편집자 주] 구충곤 군수의 19805월 항쟁 화순 유적과 관련된 탐방 기고문 화순의 5월 민주화 항쟁유적과 추모비를 찾다를 상·하편으로 나눠 게재합니다. ‘상편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 시민군이 최초로 무장한 화순역 광장과 19805월 광주와 화순의 상황을 담았습니다. ‘하편에는 518 화순 유적들의 의미와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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