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의 시위대 ‘총’으로 무장하다

상편 <화순의 5월 민주화항쟁 유적과 추모비를 찾다>에서 이어집니다.

화순매일신문 | 기사입력 2019/05/17 [07:30] 글자 크게 글자 작게

화순의 시위대 ‘총’으로 무장하다

상편 <화순의 5월 민주화항쟁 유적과 추모비를 찾다>에서 이어집니다.

화순매일신문 | 입력 : 2019/05/17 [07:30]

▲ (그림) 구충곤 화순군수.     ©화순매일신문

광주의 시위대와 화순군민들은 역전파출소에서 총기를 입수했다. 시위대가 시민군이 되는 순간이었다. 계엄군의 폭력을 방어하기 위해 시작한 무장, 그 절박한 몸부림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총기로 무장을 하면서도 시위대의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화순군민들은 시민군으로 변모하기 시작한 시위대에게 빵과 음료수 등을 제공하였다. 군부 독재에 맞서 무장력을 강화한 체 대동과 평화를 향한 힘찬 메아리가 화순에서 찬란하게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대한민국과 아시아의 민주화 여정에서 영원히 꺼지지 않을 불꽃의 점화였다.

 

화순 시외버스 터미널 주변에서 벌어진 그 날의 함성은 개인택시 승차장 뒤편의 공터에 위치한 추모비에 오롯이 새겨져 있다. 시민군이 역전파출소 등에서 무기를 확보한 이후 터미널 주변에 운집하여 있을 때 광주와 화순의 경계인 너릿재를 넘던 차량이 총격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계엄군의 화순 진입은 시간문제라는 불안감에 예비군 동원령까지 내려질 정도로 움직임이 급박했다. 예비군들이 화순지역 청년들에게 총기를 배분했으나, 계엄군이 화순으로 진입할 가능성이 희박해지면서 회수작업이 진행되었다. 회수된 총기는 4.5톤 트럭 2대에 실려 인근 만연사로 옮겨졌다. 만연사 입구를 비롯하여 화순군민이 모여든 군청 앞과 경찰서 사거리 등에 518 표지석이 세워진 이유이다.

 

▲ 화순군 청사의 5.18 추모비.     © 화순매일신문


총기 반납을 거부하는 시위대의 반발도 거셌다
.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 확실한 방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었다. 총기만 지급받은 이들은 실탄을 구하기 위해 714 예비군 관리대대를 찾았다. 그러나 대대장은 이들을 설득하며 회유할 뿐 실탄을 내주지 않았다.

 

화순탄광서 입수한 다이너마이트, 계엄군의 광주 진입을 억제한 방어막 역할

19805월 광주의 수문장 역할을 했던 다이너마이트는 화순광업소에서 확보되었다. 광업소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도로 옆에 518 사적지를 알리는 표지석이 위치한다. 그 역사의 현장에서 무력감이 엄습해 온다. 화순탄광의 폐광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지난 100년 동안 화순 경제의 대동맥 역할을 하던 화순탄광. 그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면서 아픔과 고통에 숨마저 제대로 쉴 수 없는 절망감에 목이 메인다. 화순탄광 노동자들은 산업 전사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선구자였다.

 

1946815. 화순탄광 노동자들은 미군정과 너릿재 부근에서 충돌하여 30여 명이 살해되고 500여 명이 부상당하는 큰 아픔을 겪었다. 탄광 노동자들은 총파업으로 맞서 3달 이상 투쟁을 지속하였고, 11월 초에는 미군이 탄광마을을 습격해 5명이 사망하고 25명이 부상을 입기도 했다. 세월이 35년이 흐른 후 화순탄광 노동자들은 5.18운동 진행 과정에서 또 다른 큰 역할을 수행했다. 화순과 광주의 시위대는 화순읍의 714 예비군 관리대대에서 실탄을 구하지 못하였지만, 521일 밤 9시 무렵 동면 운농리 신운마을 앞길에서 픽업차량과 마주친다. 무기를 구할 수 없느냐는 물음에 픽업트럭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조립되지 않은 다이너마이트를 건네주었다.

 

▲ 화순광업소 정문 앞 5.18추모비.     © 화순매일신문


화순광업소에 근무하던
13명의 시위대가 다이너마이트 조립 작업을 마친 후 광주로 옮기기 시작했다. 차에 싣고 있던 다이너마이트가 터질까 노심초사하며 광주에 도착한 시각은 22일 아침 7시였다. 총을 들이미는 공권력을 막아낼 강한 방패가 무엇보다 절실한 상황에서 다이너마이트를 손에 넣은 광주 사람들과 시위대는 환호성을 터뜨렸다. 그에 앞서 전날 밤 전남도청 지하실에는 8톤 트럭 1대 분량의 다이너마이트가 옮겨져 있었다. 시위대가 화순광업소에서 운반해 온 것들이었다. 518 증언록에 따르면 당시 화순광업소 직원들이 다이너마이트를 내주었다고 한다. 화순광업소에서는 TNT 화약 외에 카빈 소총 64정까지 내주었다.

 

곧이어 화순경찰서에서 카빈과 M1 소총 200여 정, 수류탄 230여 개, 실탄 14,000여 발을 확보하였다. 동복지서와 능주지서에서 카빈 및 M1 소총 1,300여 정, 실탄 22,000여 발을 거두었다. 동복 예비군 무기고, 남면지서, 동면지서, 북면지서 등에서도 총과 실탄을 확보했다. 화순광업소에서 유출된 다이너마이트는 27일까지 7일 동안 광주 시민들을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하였다. 계엄군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수단으로써 전남도청 주변 담장에 설치되지만 한 번도 공격을 위해 사용된 적은 없다. 다이너마이트는 19805월 광주를 사수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너릿재의 붉은 상흔, 민주화의 여정에서 흘린 영광의 상처

화순광업소를 떠나 너릿재로 향하였다. 너릿재는 무등산 정상의 줄기가 남동부로 뻗어 화순군과 광주광역시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이다. 영산강의 지류인 광주천과 화순천의 분수계를 이루는 곳이기도 하다. 너릿재는 무등산에서 장불재로 이어져 남쪽 수레바위산과 소룡봉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너릿재는 1971년 터널이 개통되기 전까지만 해도 눈이 많이 오면 한 달 넘게 길이 끊기기도 했다. 그 이전에는 낮에도 산적이 나오는 험한 고개였다. 그 험했던 너릿재 옛길이 지난 2012년 행정자치부에서 아름다운 자전거길 100에 선정할 만큼 아름다운 길로 변모했다. 최근에는 개발제한구역 환경문화사업 공모사업을 통해 산책 주변에 음지 식물을 심고 쉼터를 만드는 등 명품 숲길(L=2.1)을 조성하였다.

 

▲ 화순읍 너릿재 부근의 5.18추모비.     © 화순매일신문


화순의 산책과 데이트 명소 너릿재 옛길
. 이곳은 민족의 독립과 민주화를 향한 기나긴 여정에서 학살과 통곡의 무대였다. 갑오농민혁명 때에는 농민군들이 너릿재 아래의 이십곡리 마을 입구에서 무더기로 처형되었고, 1907년에는 양회일이 화순 의병들을 이끌고 광주로 진격하다가 차단되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는 815 1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던 노동자들이 너릿재 정상 부근에서 미군의 토끼몰이 진압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되고 상처를 입었으며, 6·25 전쟁 때는 군경과 빨치산이 대치했다.

 

5.18 추모비는 화순과 광주를 연결하는 너릿재 터널 바로 앞에 위치한다. 소아르 미술관 입구에 세워져 있으며, 다른 추모비와는 달리 세련된 형태를 갖춰 오월의 횃불로 불리기도 한다. 5.18 당시 너릿재에서는 공수부대에 의해 학살이 자행되었다. 521일 광주 시내에서 조선대학교 뒷산을 넘어 퇴각하여 인근 주남마을에 주둔하던 계엄군들이 광주와 화순을 연결하는 도로 통행을 통제하고 있었다. 523일 오전 버스가 지원동을 지나 주남마을 입구에 들어설 즈음 도로변에서 군인 한 명이 정지신호를 보냈다.

 

버스 운전사는 멈추지 않았다. 주남마을을 지키던 11공수여단 62대대 4지역대 병사들이 버스에 발포를 하였다. 버스에 타고 있던 시민 15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당하였다. 계엄군은 부상을 당한 2명을 주남마을 뒷산으로 끌고 가서 살해하였으며, 1명만이 살아남았다. 국방부 문건에는 계엄군과 시위대 사이 교전이 발생했다. 군인 1명이 부상당하고 시위대는 17명 사망, 2명 부상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학살이 자행되었던 주남마을 인근의 계엄군이 시신을 매장했던 곳에는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광주의 주남마을 외에 화순 이십곡리의 도로변에도 5.18 추모비가 세워졌다. 40여 년 전 화순에서 일어났던 5.18의 자랑스러운 함성. 그 정신을 계승·발전시키려는 의지를 굳게 다지고, 민주화 역사 현장의 발자취를 찾아 나선 의미 있는 일정이었다. 5. 18을 비롯하여 화순지역의 민족항쟁 및 민주화 유적의 정비와 관리·보존에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구충곤 화순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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