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氣)의 고장, 영암을 거닐다

비둘기가 지켜 낸 한반도 최고의 설득 시스템

김재근 객원기자, 최순희 전남문화관광해설사 | 기사입력 2024/07/19 [07:01] 글자 크게 글자 작게

기(氣)의 고장, 영암을 거닐다

비둘기가 지켜 낸 한반도 최고의 설득 시스템

김재근 객원기자, 최순희 전남문화관광해설사 | 입력 : 2024/07/19 [07:01]

▲ 월출산     ©화순매일신문

비가 오는 것도 오지 않는 것도 아닌 장마가 2주 넘게 계속되었다. 비가 잠시 주춤한 713, 영암으로 갔다. 불어오는 바람에 구름이 흘러가고 지나가는 바람에 풀잎이 기우는, 나들이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었다.

 

월출산(月出山)은 본래 돌이 솟아나는 산이었다. 예전에 ()’이 아닌 이라는 뜻이었다. 지금은 달이 뜨는 산이다. 남쪽으로 구림리 모정마을이 있다. 마을 앞 저수지에 달밤에 비치는 모습이 아주 예뻤다고 한다. 이 고장 출신 하춘화의 영암 아리랑도 한몫했을 터이고.

 

영암을 기()의 고장이라고 한다. 월출산이 지상의 기를 모아 하늘로 솟구치는 형국이기 때문이라며. 이천이백여 년 전, 그 기를 받아 들어선 마을이 있다. 구림이다. 왕인이, 도선이, 최지몽이 태어난 곳이다. 신라말엽 천호 이상 되는 큰 마을이었다고 한다.

 

▲ 상대포     ©화순매일신문

구림의 노른자, 상대포(上臺浦)에서 시작했다. 연못이라고 하기에는 크고 호수라고 하기에는 작았다. 절벽 닮은 바위가 있었고, 상대정이라는 정자가 마주 보고 있었다. 돛배 한 척이 여유로웠다. 다리가 물 위를 가로질렀고, 잉어가 연꽃이 반겼다.

 

국제 무역항이었어요. 왕인 박사도 이곳에서 배를 탔어요. 최치원이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곳이기도 합니다. 상대포에서 흑산도까지 이틀, 그곳에서 중국 영파항까지 이틀거리였습니다.

 

상대는 바위 이름입니다. 천연의 선착장이라고나 할까요. 지금 같으면 콘크리트로 만들었겠지만. 현정은이라고 아시죠. 현대그룹 회장님요. 1943년도에 그분 할아버지께서 바닷물을 막았어요. 간척지가 한 260만 평 생겼죠. 바닷물이 안 들어온 지도 벌써 80년이 넘었습니다.”

 

상대포가 국제 무역항으로 이름을 떨치던 시절, 첨단산업은 도자기였다. 바로 옆이 도기 박물관이다.

 

“8~9세기 영암은 남서해안의 중심지였습니다. 국내 연안 항구는 물론 중국과 일본으로도 연결되었습니다. 대규모 생활도기 산업단지가 자리한 것도 당연했습니다. 유약을 바른 최초의 도기를 만들었습니다. 고려 때 강진에서 청자가 만들어지는 데 큰 역할을 하지요.”

 

▲ 백의암     ©화순매일신문

풍수도참의 시조인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이곳 출신이라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외국과 쉽게 교류할 수 있는 곳에서 출가하고 공부했으니 당나라 풍수를 빨리 접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구림이라는 지명도 그의 탄생설화 때문이다.

 

최씨 성을 가진 처녀가 빨래하다가 물에 떠내려오는 오이를 먹고 임신을 했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마을 숲속의 바위에 버렸는데, 며칠 뒤에 가보니 비둘기 떼가 날개로 아이를 덮어 보살피고 있었다. 그 아이가 바로 다. 아이가 버려졌던 바위는 국사암(國師巖)’, 마을은 비둘기 떼가 많다 하여 구림(鳩林)’이라 불리게 되었다.

 

도선과 관련된 전설이 있는 바위가 하나 더 있으니, 백의암(白衣巖)이다. 상대포에서 5분 거리에 서구림리 백암동 마을 앞 들판 가운데 있다. 간척 전에는 바다에 있는 작은 섬이었다.

 

중국 황제가 묫자리를 잡으려고 도선을 데려갔나 보다. 배를 타고 가던 도선이 이 바위 앞을 지나다가 옷을 벗어 던지며, 살아 있으면 바위가 하얀 채로 있을 것이며, 죽으면 검게 변할 것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도선은 중국에 간 적이 없으니 잘못된 표현이라고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오이 먹고 태어난 분인데. 데크로 둘러싸인 바위는 대부분이 검었다. 이곳이 섬이었다면 바닷물에 씻겨 흰색이었을 것을. 아주 일부지만 하얀 부분도 있었다. 영원히 살아 있기를 소원했다.

 

왕인도 이 마을 출신이다. 영암을 물으면 그를 먼저 이야기하고, 그의 이름을 딴 축제도 있다. 왕인 박사는 4세기 백제 사람이다. 학문에 두루 밝은 사람을 박사라 하였다.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으로 갔다. 아스카 문명이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 소통과 상생의 산증인이자 영암의 자랑스러운 인물이라고 안내했다.

 

왕인박사유적지는 구림마을 위쪽에 있었다. 규모에 압도당했다. 60만 평, 축구장 270여 개의 면적이다. 청와대 본관 닮은 전시관이 기를 죽였다. 양념처럼 동상이 있고, 일대기를 표현한 석조 부조가 있고, 일본에서 선물했다는 조그마한 정원이 있고, 가묘가 있다. 탄생지라는 소박한 시설이 더 무게감 있지 않았을까, 아쉬웠다.

 

▲ 갈낙탕     ©화순매일신문

월출산도 식후경이다. 남쪽으로 10여 분 달려 독천 낙지 거리로 갔다. 연포탕과 갈낙탕 사이에서 망설였다. 갈낙탕이야 갈비와 낙지로 끓인 탕이라고 짐작이 갔지만, 연포탕(軟泡湯)은 와 닿지 않았다. 네이버에 물었다. 국어사전은 쇠고기, , 두부, 다시마 따위를 맑은장국에 넣어 끓인 국. 초상집에서 발인하는 날 흔히 끓인다.”라고 하였다. 연폿국이라고도 했다. 나무위키에서는 낙지를 넣고 끓인 찌개로 해산물 찌개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독천식당 주인장은 갈낙탕을 이렇게 소개했다.

 

이곳 지명이 독천인데, 큰 시장이 있었어요. 소를 많이 팔았대요. 그래서 송아지 독()자를 써서 독천이라고 불러요. 지금도 오일시장이 서요. 부모님이 이곳에서 갈비탕을 팔았어요.

 

문수포라고 바다가 가까웠습니다. 그곳 뻘에서 낙지가 엄청 많이 잡혔어요. 이곳 독천장에서 팔았답니다. 우리 집 앞이 전부 낙지를 파는 빨간 대아였어요. 갈비탕에 낙지를 넣어서 끓여봤답니다. 손님들이 맛있다고 그러더래요. 70년대에 열었으니까. 벌써 50년이 넘었네요.”

 

지리한 장마에 눅눅해진 이불을 쨍한 햇살에 말린 듯한 개운한 맛이었다. 연포탕이 건조만 한 것이라면 갈낙탕은 다림질까지 한 것이라고 할까. 효능도 좋았다. 다음 날 새벽 솟구치는 힘에 일찍 깨어났으니.

 

세하(細蝦)젓도 일품이었다. 아주 작은 새우로 만든 젓인데, 자하젓이라고도 했다. 하얀 새우가 숙성되면서 보랏빛으로 변하기 때문이란다. 조선시대 때 증국 사신이 이 젓을 먹고 너무 맛있어서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해서 감동젓이라고도 불린댔다. 눈처럼 새하얀 쌀밥에 젓갈 넣어 비벼 한 입, 눈물을 흘렸다던 중국 사신이 이해되었다.

 

▲ 작은 사진은 불타기 전의 대웅보전 모습. 성보박물관에서 촬영한 도갑사 대웅전.     ©화순매일신문

눈맛을 찾아 도갑사로 방향을 잡았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구림마을에서 멀지 않았다. 구정봉을 지나 천황봉에 이르는 월출산 등산로 초입이다.

 

신라의 4대 고승에 속하는 도선국사가 헌강왕 6년에 창건했다. 수미선사가 1456(세조 2)966칸의 대가람으로 중창했다. 절 뒤편 월출산 오르는 길로 용추폭포를 지나면 도선수미선사비가 있다.

 

하나의 비석에 창건한 도선국사와 중창한 수미선사 두 분의 업적을 기록했습니다. 높이는 5m가량 됩니다. 비석을 받치고 있는 돌거북은 아마도 우리나라 비석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아닐까 싶어요. 받침인 거북은 이곳 돌이지만 몸체는 대리석이에요. 익산에서 배로 싣고 왔다고 해요. 예전에는 밀물 때 이곳까지 합니다.”

 

▲ 관음 32응신도     ©화순매일신문

도갑사에서 빼놓지 말아야 할 곳이 성보박물관이다. 주말에만 볼 수 있다. 해탈문에 있던 코끼리 탄 보현보살과 사자 탄 문수보살상도 이곳에 있다. 오동통한 뒤태가 상큼하고 귀엽다. 제일인 것은 관음 32응신도(觀音三十二應身圖)이다. 아쉽게도 원본은 아니다. 실물대 정밀 복사본이다. 유홍준은 이렇게 평했다.

 

조선시대 불화의 최고 명작이다. <몽유도원도> 못지않은 작품이다. 높이 2.3미터, 1.3미터다. 관세음보살이 32가지로 변신하여 중생을 구제한다는 내용을 그림으로 풀어낸 것이다. 화려한 고려 불화의 전통과 조선 전기의 산수화풍이 어우러졌다.

 

1550년 인종 왕비인 공의왕대비가 인종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이자실(李自實)에게 그리게 하여 도갑사에 봉안했다. 일본의 지은원이 소장하고 있다. 임진왜란, 또는 그 직전, 이 일대에 빈발하던 왜구들이 약탈해 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영산강의 중심도 변해갔다. 영암의 옛 이름은 옹주였다. 신라 때는 도호부가 설치되었다. 고려 때 나주로 옮겨갔다. 이제는 무안이다.

 

영암을 뒤로하며 백의암을 생각했다. 여전히 하얗게 빛날 것 같다. 민주주의의 미덕은 다양한 의견이다. 이 미덕이 불편할 때가 있다. 무언가 옮길 것을 정할 때다. 이때 만능열쇠가 비둘기가 지켜 낸 한반도 최대의 설득 시스템인 풍수다. 전라남도청도 무안에 자리 잡으며 명당이라고 자랑했다. 문득 도청의 입지가 궁금해졌다.

 

여행지에서 만난 한은화, 유승열, 정희봉 세 분의 영암군 전남문화관광해설사님께 고마움 전한다.

 

- 네이버블로그(cumpanis) <쿰파니스 맛담멋담>에서도 볼 수 있다.

광고
이동
메인사진
포토뉴스
무등산의 ‘四季’
이전
1/35
다음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