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과 만남이 노래와 영화가 되다

낭만 항구에서 듣는 ‘목포의 눈물’

김재근 객원기자 | 기사입력 2024/08/14 [07:01]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이별과 만남이 노래와 영화가 되다

낭만 항구에서 듣는 ‘목포의 눈물’

김재근 객원기자 | 입력 : 2024/08/14 [07:01]

▲ 유달산에서 본 목포시 전경. 왼쪽 세 개의 봉우리가 삼학도이다. 왼쪽 끝은 영산강 하굿둑이다. 앞쪽은 영암이다.     ©화순매일신문

 

목포역에서 목포역까지 걷고 또 걸었다. 벼르고 별러서 도착한 유럽 어느 도시에 온 듯. 87, 입추(立秋)가 무색하게 여전히 햇살은 날카롭고, 공기는 뜨거웠다. 이가 부러질 정도로 딱딱한 아이스크림이 몇 걸음 만에 흘러내렸다. 그날, 32천 보를 걸었다고 만보기가 알려 주었다.

 

도시도 기억한다. 어떤 형태로든 과거를 간직하고 있다. 거리에 건물에 물건에 이야기를 담고 도시의 특징을 만들어간다. 목포는 물 위의 도시다. 시가지의 80%가 바다였던. 일제 강점기, 목포는 호남 최대 항구도시였다. 유달산을 경계로 북촌과 남촌으로 나뉘었다. 언덕배기 북촌은 조선인, 신시가지 남촌은 일본인 거주지.

 

목포역 광장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좌측으로 5분쯤 걸으면 오거리가 나온다. 원도심 주요 공간을 연결하는 교차로로, 조선인과 일본인 거주지역의 경계점이었다. 오거리에서 바다 방향으로 몇 걸음, 2층의 붉은 벽돌 건물이 있다. 옛 호남은행 목포지점이다. 지금은 대중음악의 전당으로 이용된다. 이곳부터 목포근대문화공간이 시작된다.

 

과거 일본인들이 다니던 소학교 일대에서 목포역 방향으로 이어진 대표 도로를 중심에 놓고, 유달산·목포진선창을 연결하는 구조이다. 옛 일본영사관을 비롯하여, 동양 척식 회사 건물, 일본인들이 다녔던 학교와 교회, 일본식 민가, 백화점을 비롯한 상업 시설 등이 밀집해 있다.

 

해안을 간척하여 근대 시가지가 형성된 이후, 항구도시 목포 사람들 삶의 터전이 되었다. 1980년대까지도 목포 상권의 중심이었다. 지금도 당시의 바둑판식 도로 구조와 근대 건축물이 원형대로 잘 남아있다. 등록문화재 제718호로 지정되어 지붕 없는 문화재로 불린다.

 

옛 영화가 퇴락하여 더 쓸쓸하게 느껴지는 화신연쇄점을 돌아 상가 거리로 들어섰다. 도로 좌우로 당시의 건물과 현대식 건물이 마주 보며 늘어선 쭉 뻗은 도로다. 계속 나아가면 민어 거리를 지나 근대역사관으로 이어진다. 모자아트갤러리 앞에서 좌측으로 향했다. 목포항을 먼저 만나고 싶었다.

 

▲ 목포항. 건너편이 삼학도 유람선 선착장이다. 그 뒤로 영산강 하굿둑이 보인다.     ©화순매일신문

 

목포항은 동남쪽에 영암반도가 남서쪽에 고하도가 뒤쪽엔 유달산이 자연방파제 역할을 하는 천혜의 항구다. 남쪽 포구라 하여 남포맑포목포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지형이 외나무다리처럼 길고 홀쭉하다고 해서 그리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고종은 1895년 무안군에서 분리하고, 1897년 관세 징수를 목적으로 개항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은 이곳에서 1(一黑- ) 3(三白 - ·면화·소금)을 무진장 실어 갔다.

 

먼 항해를 다녀온, 고기잡이를 마치고 돌아온 배들이 한가로웠다. 햇살이 내려앉고 갈매기가 몇 마리 날았다. 연락선은 어디로 떠나려는지 더운 숨을 토해냈다. 여객터미널 건물은 웅장했다. 국내선 대합실엔 띄엄띄엄 부채질을 하는 사람이 보였지만, 국제선 대합실은 할머니 한 분이 그림처럼 졸고 있을 뿐 한산했다. 가거도로 홍도로 흑산도로 가거도로 가는 배편 안내서가 대신 인사했다.

 

항구 뒤편은 목포진이 있었다는 바위 언덕이다. 세종 때(1439) 이곳에 처음 진을 설치하고 만호를 파견하였다. 시야가 탁 트였다. 전면으로 목포항과 삼학도 영산강 너머 영암 땅까지 한눈에 보인다. 우측으로 고하도, 뒤로 유달산이다. 가히 군사요충지라 할만하다. 객사 건물 하나가 덩그러니 외롭다. 바다 쪽으로 소년 김대중 공부방이 자리 잡았다. 하의도 섬 소년이 목포로 유학 와서 꿈을 키웠던 곳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처음 본 목포를 별천지였다고 했다. 그는 목포에 올 때마다 목포의 눈물을 불렀다. “목포의 딸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 가락도 구슬프지만, 노랫말 또한 예사롭지 않다. 님이란 이순신 장군을 가리킨 것이니 나라를 뺏긴 설움을 토해낸 것이다. 목포만의 노래가 아니라 나라 잃은 겨레의 노래였다.”

 

옆방에선 이난영이 목포의 눈물이 쉼 없이 이어진다. 창밖으로 목포항이 삼학도가 환하다. 액자 속 그림 같은 풍경이다. 목포 앞바다 간척으로 육지가 되어 봉우리만 남았다. 작은 봉우리는 유람선 선착장이다. 가운데 봉우리는 김대중노벨평화상기념관이 자리잡았다. 큰 봉우리는 이난영 묘지를 품은 공원이 들어섰다. 목포를 대표하는 두 인물이 이웃하여 봉우리를 차지하고 삼학도의 전설을 지키고 있다.

 

▲ 사진 왼쪽은 시내 중심 도로에서 본 구 영사관 건물. 오른쪽은 영사관 2층 중앙 창에서 본 시내 풍경 사진 끝에 고하도 케이블카 기둥이 보인다.     ©화순매일신문

 

목포진지에서 노적봉 아래까지가 일본 거주지였다. 민어거리로 내려가서 문화공간을 걸었다. 꼼지락 실험실이, 주막집이, 유달동 사진관이 지났다.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에 차려진 근대역사관 2관에서 땀을 닦았다. 심상소학교를 보고 성옥기념관에도 들렀다. 드디어 근대역사관 1관으로 쓰이고 있는 옛 일본영사관 건물이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은 원근법은 세상을 보는 눈은 하나여야 한다는 독점적 시각이라고 했다. 자신의 시선이 닿는 모든 곳이 자기 권력 안에 있음을 확인하려는 것으로 소실점은 권력이라고 했다. 이 건물이 그랬다. 노적봉을 뒤로 두고 고하도가 정면으로 보이는 높직한 터에 위치했다.

 

중앙으로 일직선 대로를 두고 바둑판식으로 시내를 만들었다. 대로에서 바라보면 소실점은 영사관 2층 발코니로 향했다. 2층 발코니에서 내려다보면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고 그 끝에는 고하도가 있다. 바로 앞에는 우체국을 두고, 국도 1호선과 2호선 도로의 원점으로 잡았다. 보이지 않는 곳까지 지배하고자 하는 점령자의 의지였다.

 

고하도와 노적봉은 이순신 장군과 관련 있다. 고하도는 명량대첩 후 106일 동안 머무르며 노량해전을 준비한 곳이고, 노적봉은 짚으로 바위를 둘러쳐 군량미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해서 왜적을 물리쳤다는 설화가 서린 곳이다.

 

▲ 목포 서산동 벽화 거리.     ©화순매일신문

 

일본인 거주지역 서쪽 언덕배기가 서산동 벽화거리다. 1980년대 시간이 멈춘 곳이다. 산자락을 따라 집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동네다. 영화 1987에서 연희(김태리)네 집인, ‘연희네슈퍼에서 보리마당까지 골목이 거미줄처럼 이어진다. 사람들이 정착해 마을을 이루기 전에 넓은 보리밭이었다.

 

어부들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항구가 가깝고 평지보다는 싸게 터전을 마련할 수 있어서죠. 그들의 애환이 어린 말이 있는데, ‘조금 새끼입니다. 사리에 고기를 잡고 조금 물살이 잔잔할 때 집에 왔습니다. 모든 어부가 그러했으니 부부가 만나는 시기가 다들 같았죠. 아이들 생일이 거의 비슷해서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어촌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담아 2015년부터 3년에 걸쳐 조성했다고 한다. 골목엔 빈집과 생활하는 집이 가게가 있고, 찻집이 있고, 체험장이 있다. 서울 종로구 이화동 벽화거리가 떠올랐다. 이름과 달리 벽화가 없는 동네다. 주민들이 지워서다. 생활에 도움은커녕 피해만 되는 관광객의 귀찮아서란다. 발길이 조심스러웠다.

 

▲ 사진 위쪽은 갓바위에서 본 평화광장. 아래는 춤추는 바다 분수.     ©화순매일신문

목포는 야경의 도시였다. 평화광장 밤 풍경은 화려하고 시끌벅적했다. 바닷가 산책길 따라 정원과 식당과 카페가 이어졌다. 처음엔 미관광장이라 하였으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기념하여 평화광장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바닷바람 벗 삼아 갓바위 해상보행교까지 걸었다. 산책하는 운동하는 구경하는 사람들을 지나서. 강아지를 유일한 관객으로 두고 기타 연주 버스킹을 하는 분에게 박수도 보냈다. 광장 중앙에 있는 춤추는 바다 분수 앞에 앉았다. 음악과 레이저가 조화로운 초대형 분수다. 안개처럼 피어오른 물이 바람에 실려 얼굴에 닿았다. 짭짤한 시원함이다. 목포의 낮이 이성적이라면 밤은 감성적이었다.

 

항구에선 이별과 만남이 교차한다. 이별은 사연이 되어 노래가 영화가 된다. 어쩌면 항구라는 이름 자체만으로 낭만이 떠오르는 건 인지상정일지도. 낭만적이라는 말은, 부드럽고 나긋나긋하고 감상적인 분위기가 있다는 뜻도 있지만, ‘철 없다는 의미도 있다. 한 번쯤 철부지가 되어보고 싶은 꿈, 그 꿈에서 살아가는 힘을 얻기도 하니까. 여행의 한 가지 이유일지도 모른다.

 

막차 떠날 시간이 가까워온다. 꿈에서 현실로 돌아올 때다. 나는 기차를 타고, 강물은 바다가 되어 흐르고. 평화를 마음속 종이배에 실어 물에 띄웠으니, 신안 천사섬을 돌고 돌겠지.

 

안내와 도움을 주신 최영민박인숙 그리고 차주면김상안김문심 목포시 전남문화관광해설사께 고마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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